Home 철길생각 기획/특집 시베리아 횡단철도-2

[기획연재]시베리아 횡단철도-2

485
0
SHARE

(‘기획연재’는 철도신문에 2014년 부터 지면으로 연재된 기사를 인터넷을 통해 재 연재하는 기사입니다.)

3. 1894년 10월 알렉산더 3세가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세르게이 비테의 정적들은 그를 희생양으로 삼아 강제 해고한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사업의 가장 큰 지지자 두 사람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이제 아버지의 비전을 완수할 책임은 27세의 젊은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것이다.

니콜라이 2세

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에 대해 역사는 무능하고 잔혹하며 냉담한 군주였다는 평가를 내린다. 일례로 일본과 교전 중이던 러시아함대의 전멸을 알리는 전보를 읽고서 황제는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 그것을 집어넣고 치던 테니스를 계속 쳤다고 한다. 아버지 알렉산더 3세는 황태자가 서른이 되면 그때부터 후계자 수업을 시킬 생각에 고의적으로 그를 정무에 무지한 상태로 두었는데, 문제는 그가 자신의 수명까지 계획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1898년 러시아는 공사 시작 7년 만에 나름의 쾌거를 이룬다. 바로 수도 모스크바와 시베리아 제일의 도시 이르쿠츠크가 기차로 연결된 것이다. 당시 세계는 이것을 놀라운 업적이라며 찬탄했는데, 러시아가 신기술을 개발했다거나 까다로운 공학적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토록 가난한 나라에서 한참 뒤떨어진 기술을 가지고 동토의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세계 최장의 철도를 부설했다는 인간승리적인 면모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와 이르쿠츠크, 이 두 도시의 거리만으로도 이미 미국의 대륙횡단철도 보다 길었으니 어찌 어깨가 으쓱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공까지는 아직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역 (이미지=나무위키)

1900년 횡단철도는 동과 서를 잇는 중간 지점의 300km 구간을 제외하고 모두 연결된다. 이제 그 나머지 부분만 연결하면 되는데, 여기서 러시아는 횡단철도 공사상 가장 큰 장애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땅이 아니라 물이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이칼 호수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바이칼 호는 길이 643km, 폭 96km, 수심이 1.6km에 이르며 주변은 해발 2000m의 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거의 일 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는 이 산맥은 마치 상어의 이빨처럼 호수의 수면 위로 곧장 솟아올랐다는 점이 경이로운데 화산활동과 격렬한 지진으로 땅이 내려앉으면서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철도가 부설될 호수의 남쪽 기슭은 급경사에 깊은 함몰지대가 있는 험난한 지역으로 수많은 터널과 교량이 필요하기 때문에 1km 당 공사비가 다른 지역보다 여섯 배 이상 들어갈 전망이었다.

  1. 철도위원회의 결정은 만장일치였다. 산을 뚫지 말고 좀 더 쉬운 길을 찾자는 것이다. 위원회는 미국이 증기선에 열차를 실어 미시간호를 건너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영국 암스트롱사에 ‘바이칼’이라는 이름의 쇄빙선 건조를 주문한다. 암스트롱사는 12개월만에 바이칼호를 건조했지만 그것을 시베리아 내륙의 바이칼 호수에 띠우는 것은 배를 건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영국은 배를 완전히 분해한 상태에서 뱃길과 기찻길을 통해 러시아에 보내고, 러시아 기술진은 이것을 다시 암스트롱사의 자문을 받아 조립했다. 이 과정에서 공사는 무려 3년이나 지연된다. 우여곡절 속에서 완성된 바이칼은 승객 1200명, 화차 28량, 기관차 12량을 싣고 두께 1.2m의 얼음을 부수며 시속 13노트로 항해할 수 있는 가히 세계 최강이자 최대의 쇄빙선이었다.
바이캃호수 주변 노선과 역

그러나 바이칼은 운항 1년 만에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수로학자들이 겨울철 바이칼호의 얼음두께를 1.2m로 계산한 것이 화근이었다. 막상 배를 띄워보니 얼음의 두께가 2.7m도 넘는 것이 아닌가! 빙판 속에서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오지도 못하는 바이칼호를 지켜보다 다급해진 마음에 곡괭이와 도끼로 빙판을 깨며 길을 내보려고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봄부터 가을까지는 짙은 안개와 거센 풍랑 때문에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가 많았으니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 사이의 철길은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툰 기획 때문에 엄청난 돈과 시간과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이제 철도위원회에게 다른 대안은 없다. 호수 위로 솟아 오른 화강암 산맥지대에 38개의 터널을 뚫으며 260km의 선로를 놓는 것 밖에는. 바이칼라인은 미횡단철도가 넘은 로키산맥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공사로 평가된다. 우선 지형적으로 더 험난하다. 그리고 러시아는 미국이 누린 첨단장비의 혜택을 조금도 누릴 수 없었다. 러시아는 시작부터 끝까지 순전히 인간의 피와 땀과 눈물에 의지해 철도를 부설했다. 아마 공사 기간 중 러시아가 누린 유일한 호사는 영국제 쇄빙선 바이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띄우는 20세기 초에 19세기 중반 공법으로 쉬지 않고 꾸준히 철길을 닦은 러시아는 드디어 공사시작 14년만인 1904년 대륙횡단철도의 완공을 목전에 둔다. 마침내 제국의 길을 닦았다는 뿌듯함과 흥분감에 도취된 니콜라이 2세는 시베리아횡단철도가 동양에서 러시아군의 역량을 새롭게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치하한다. 그러나 황제는 차라리 이 말을 안했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그의 생각 없는 자랑에 자극된 일본이 1904년 2월 8일 러시아함대를 기습 공격한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두 열강의 세력다툼이 제물포 앞바다에서 충돌했던 러일전쟁. 우리로서는 매우 수치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다. 일본은 일부러 철도가 가장 취약한 한겨울에 공격을 감행했다. 표준 이하의 설계로 부설된 연철 선로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군대와 무기를 가득 실은 차량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고, 단선철도로는 신병 공급과 부상병 후송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최대한 싸게’라는 러시아의 정책이 전쟁을 만나 그 약점을 여실히 드러낸 셈이다.

러일전쟁풍자화(이미지=나무위키)

전쟁은 발발 1년 만에 황제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패배로 끝났다. 패전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 철도는 다시금 고통스러운 재건의 과정을 겪어 1916년에 완공된다. 그러나 완공을 기념하는 경축행사는 없었다. 모두가 너무 지쳐버린 것이다. 횡단철도건설과 러일전쟁으로 국가재정이 바닥나자, 그렇지 않아도 가난했던 러시아 국민은 극빈의 상태로 전락했고, 현대화되지 못한 러시아군대는 1차 대전에서 끔찍한 희생을 치른다. 일단 개통만 되면 러시아를 세계무역의 중심으로 부상시켜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어졌던 로마노프 왕조의 희망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결국 볼셰비키혁명을 불러왔고, 니콜라이 황제는 바로 그 철길로 시베리아로 이송되던 도중 소비에트 당국에 의해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당한다.

그 후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내전당시 공산군의 세력기반 다지기에 이용되었고, 2차 대전 중에는 새로운 군대를 전선에 공급하여 히틀러의 우위를 역전시켰다. 1950년대부터 소련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침목을 교체하고 레일을 강철로 업그레이드시키는 한편, 새로운 교량과 복선을 완공하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철도를 탄생시킨다. 제국을 관통하는 철도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만한 능력이 없었던 로마노프 왕조가 사라진지 1세기가 지난 오늘,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황제가 그토록 염원했던 그 꿈을 광대한 벌판을 달리며 자랑스럽게 수행하고 있다.– 계속/<편집국 대륙철도 기획팀> 2014년2월26일 철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