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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시베리아 횡단철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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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는 철도신문에 2014년 부터 지면으로 연재된 기사를 인터넷을 통해 재 연재하는 기사입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노선도

식민통치의 강화-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계획

유라시아 대륙의 대동맥으로서 유럽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극동을 이으며 가장 많은 승객을 이송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오늘날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삶에 깊이 파고든 이 철길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철길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세계 최장의 거리, 위험한 지형과 영하 40도의 혹한, 엄청난 작업량과 감당할 수 없는 비용까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동원된 노동자 수는 공사가 한창이던 1896년에 8만 9천명에 달했고, 그 부설비용을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500억 달러에 이르는데, 이는 사람을 달에 보내는 비용의 두 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 대륙횡단철도의 부설은 러시아황제의 양보할 수 없는 과업으로 떠오른다. 이미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거론되어 이제는 숙원사업이 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한 중심에 자리한 대륙횡단철도. 철도신문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탄생배경과 부설과정, 그리고 그것이 불러온 역사적 비극까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과정을 면밀히 따라가 보기로 했다.

  1. 부산에서 기차에 올라 평양과 러시아를 거쳐 런던이나 파리에서 내린다! 대륙횡단열차에 몸을 싣는 것. 그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보헤미안 기질을 마음껏 발산하고픈 많은 꿈쟁이들의 로망일 것이다. 그런데 사정을 알고 보면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하여 모스크바까지 무려 6박7일 동안 9,950km를 달리는 이 기차여행은 우선 돈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엔 시간, 그리고 체력까지 받쳐줘야 도전해 볼 수 있는 여정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긴 해도 정작 이 경로를 택하는 사람은 그만큼 많지 않다고 한다.

1904년 개통된 시베리아횡단철도는 올해로 개통 110주년(2014년 현재)을 맞는다. 미국이 1869년에, 캐나다가 1885년에 각각 자국의 대륙횡단철도를 개통한 것에 비하면 러시아의 경우는 조금 늦었다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제국의 동서를 관통하는 길이가 미국과 캐나다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 길다. 이 어마어마한 길이에 부설될 철길은 무려 열여섯 개의 강을 건너야 하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깊은 호수를 지나야 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숲을 뚫어야만 한다. 그것도 겨울이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최악의 기후조건 속에서.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기획하고 추진하여 마침내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은 너무도 극적이어서 역사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사실 러시아횡단철도 부설 계획은 러시아 황실의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는 이미 태평양 연안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이루고 있었지만, 제국 전체를 연결하는 교통수단은 마차가 전부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황제의 명령이나 계획이 제국의 변방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 수년씩 허비되었고, 효율적 지휘통제는 먼 나라 얘기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국이 시베리아지역을 침범한다는 보고와, 러시아 해안을 위협하는 일본 군함의 존재, 그리고 시베리아 독립을 꾀하는 혁명의 움직임까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제국의 통치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81년 알렉산더 2세가 테러분자들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알렉산더3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렉산더 3세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원했고, 군사방어와 물자이동 그리고 시베리아 식민통치의 강화를 위해서는 철도만이 그 해답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미국이 대륙횡단철도로 서부를 길들였듯이, 러시아역시 철도로 동부를 길들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통신위원회에 횡단철도의 사업성 검토를 위임한다. 그러나 위원회는 시베리아에 노동력이 없고 제철소와 석탄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돈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황제에게 계획의 전면 취소를 권한다. 이에 황제는 위원회 해산으로 응수하며, 오데사 철도를 부설한 경험이 있는 ‘세르게이 비테(Count Sergei Yulyevich Witte)‘를 시베리아 횡단철도공사의 책임자로 임명한다.

1891년 5월 알렉산더 3세 즉위 10주년을 맞아 제국의 동쪽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을 위한 첫 삽이 뜨였고, 기공식엔 당시 황태자였던 니콜라이 2세가 직접 참석하여 왕실의 열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군주의 열정만으로 일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검토단계에서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14년여의 기간 동안 언제나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른 것은 돈이었다. 재정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황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능한 싸게, 가능한 빨리 공사를 진행하여 10년 후인 1901년에는 횡단철도를 개통하기 원했다. 황제 입장에선 1등급이 아닌 3등급 철도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국민에게 갖는 호소력이 컸기 때문이다.

  1. 러시아에서 1년 중 땅이 얼지 않아 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 기간은 오직 4개월뿐이다. 거의 1만 킬로에 달하는 선로를 40개월 만에 놓으려면 한 달에 250km 씩 부설해야 한다. 장비와 토목기술이 발달한 오늘 날에도 서울-강릉 간에 거리에 한 달 만에 철길을 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과연 이 난제를 세르게이 비테는 어떻게 풀어냈을까? 그는 러시아인 특유의 과감한 밀어붙이기로 승부수를 던진다. 러시아인들은 일단 황제의 칙령이 떨어지면 어떤 난관에도 “Just do it”의 정신으로 그 명령을 받든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역시 그랬다. 착공에서부터 개통의 그 순간까지 도저히 인력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작업이 지연된 적은 있어도 결코 멈춘 적은 없다.
러시아 초대 총리 ‘세르게이 비테’

세르게이 비테는 시간을 벌기 위해 전 구간을 모두 여섯 개로 나누어 동시에 공사를 진행시켰다. 이렇게 하면 한 달에 41.5km로 부담이 준다. 땅이 얼어 삽질을 할 수 없는 기간에는 교량과 터널공사에 매진했다. 자재비를 줄이기 위해 철교는 큰 강들에만 배치하고, 나머지는 목교로 대신했다. 최상의 철도가 미터 당 무게 40kg의 강철을 사용하는 복선 레일이라면 비타는 단선에 미터 당 22kg인 가벼운 철을 사용했고 침목의 개수와 자갈의 두께도 표준보다 줄여서 설계했다. 비용이 많이 드는 측량은 거의 실시하지 않았다. 다이너마이트나 장비 구입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거의 모든 공사가 노동자의 곡괭이와 삽, 톱과 손수레에 전적으로 의존했으니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진정한 의미의 핸드메이드 철도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식으로 공사비는 75%까지 줄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바로 노동력 조달이었다.

여섯 개 구간 중 가장 먼저 공사가 시작된 곳은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톡 구간이다. 일본을 견제할 군대와 물자를 태평양 연안으로 수송할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 구간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조달하기 위해 발트해를 출항한 배가 장장 40일이 지나야 태평양 연안에 도착했으니 이로 인한 공기지연이 얼마나 심각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노동력이었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철도를 대지에 남기는 ‘철의 흉터’라 여기며 노동을 거부했다. 러시아 본토에서 노동자를 모집하려고도 해봤지만 일당 12센트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동원된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죄수들이다. 당국은 그들에게 하루 일하면 하루 형량을 감해준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일할 때만이라도 사슬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사실이 죄수들에게는 감옥에서 썩는 것보다 더 매력적이었던 모양이다. 한때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그들이 이제는 가장 중요한 국책사업의 역군이 되어 기적을 창출하게 된 것이다.

비록 횡단철도 역사에 이름 한 자 남기진 못했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자기 몸 하나밖에 없는 가난한 농민, 함께 섞여 일하기엔 갈등이 깊었던 러시아 제국의 군인과 죄수, 그리고 중국과 페르시아 터키 등에서 흘러들어 온 이주노동자들이야 말로 이 경이로운 업적의 진정한 영웅들이다. 그들은 동이 트는 순간부터 높은 위도 때문에 오후 10시경에 해가 질 때까지 일하고 또 일했다. 여름철엔 해빙으로 범람한 습지에서 허벅지까지 푹푹 빠져가며 사정을 봐주지 않는 모기와 벼룩의 공격에 시달리며 일했고, 겨울엔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추위 속에서 다리를 놓고 터널을 팠다. 특히 교량 공사 중엔 자칫 실족하면 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빙판 위로 낙하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다리 하나 놓을 때마다 평균 열 명씩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다. 떨어지면서 난간을 붙잡으려 해도 이미 꽁꽁 얼어버린 손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사고가 많았던 것이다. – 계속/<편집국 대륙철도 기획팀> 2014년2월26일 철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