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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패스토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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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같은 외모, 고교 풋볼팀의 스타 플레이어, 2차 대전 참전용사, 그리고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성실히 경영하는 실업가. 이것이 모두가 부러워하는 진정한 의미의 아메리칸 아이돌 스위드(이완 맥그리거)의 인생 이력이다. 그의 행복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스 뉴저지 출신의 던(제니퍼 코넬리)과의 결혼에 이어 화룡점정으로 귀여운 딸 메리가 태어난다.

태어나 보니 아빠가 장동건 엄마가 고소영인 격인데, 메리는 흔히들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말더듬 증세를 보이며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부모를 걱정시킨다. 메리의 상담치료사에 따르면 문제의 원인은 아빠의 애정과 관심을 두고 너무 예쁜 엄마와 경쟁하는 것이 어린 메리에게는 큰 스트레스란다. 그래도 이만한 문제로 가정이 흔들리진 않는다. 그러기엔 스위드와 던의 부부관계가 아직 견고하고 메리는 너무 사랑스럽다.

어느덧 열여섯 청소년으로 성장한 메리(다코타 패닝). 아빠와의 관계는 좋아 보이지만 엄마에겐 매우 불손하다. TV에서 미군에게 저항하는 베트남 승려의 분신 장면을 본 후로 메리는 반전과 민권운동에 관심이 많다. 어울리는 무리들 또한 또래가 아닌 서너 살 위의 운동권 학생들이고 마르크스는 그녀의 바이블이 되었다. 경찰관 앞에서 대놓고 정부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는 메리의 모습이 낯선 스위드. 그래도 그는 딸의 선함을 믿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체국 폭탄 테러로 인명사고가 발생하고, 잠적한 메리를 용의자로 의심하는 경찰이 들이닥치면서 스위드와 던의 삶은 일대 혼란에 빠져든다. ‘사람을 죽이는 이 엄청난 범죄를 정말 내 딸이 저질렀을까?’

50년대 미국의 상황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였다. 대공황은 끝났고 세계대전의 종말로 젊은이들의 희생도 끝났다.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번영은 끝없이 지속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60년대의 반전 시위와 테러, 민권운동과 경찰의 폭압적 진압은 이전 시대의 영광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소시민의 삶을 흔들어 놓는다. 스위드의 인생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정확하게 그 궤를 같이 한다. 인생 후반이 어떻게 꼬여도 저렇게까지 꼬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그는 계속되는 도전에 직면하고, 별다른 지원군도 없이 홀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한다. 직장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주인공으로 분한 이완 맥그리거가 감독까지 겸한 작품이라 아무래도 스포트라이트는 스위드에게 맞춰져 있다. 아내인 던의 심적 고통과 일탈, 메리의 정치적 행동과 이후 일어나는 정신세계의 변화가 얕은 수준에서 다뤄진 점은 못내 아쉽다. 제니퍼 코넬리, 다코타 패닝 두 사람 모두 연기 잘하는 배우인데 이들의 이야기를 더 설득력 있게 끌어내지 못한 것은 초보 감독의 한계인 것 같다.

똑같은 불행에 대해 더 크게 상처받고 더 빨리 무너지지만 일단 한계점에 이르자 빨리 포기하고 현실로 돌아오는 던에 비해, 스위드는 불행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고 끝까지 싸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을 때 아내와 달리 끝내 회복되지 못하는 스위드의 모습에 험한 세상에 맞서 처자식을 지키고 부양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가장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완 맥그리거의 감독 데뷔작 〈아메리칸 패스토럴〉 필립 로스의 원작 소설과 달리 이 시대 모든 선량한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슬픈 엘레지가 아닐까 싶다.